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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대수 씨는 한국 포크 록의 시작이자 대부로 불리며 특히 1970년대의 한국 대중음악사를 논할 때 절대 빠질 수 없는 음악인입니다. 이런 그가 가슴 아픈 가족사를 공개하며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한대수 아버지 한창석 핵물리학자 실종

1948년 3월 12일 부산광역시에서 무녀독남 외아들로 태어난 한대수 씨는 백일이 지났을 무렵 아버지 한창석 씨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한대수 씨의 아버지는 연세대학교 신학대학 초대 학장을 지낸 조부의 권유로 코넬대학에서 핵물리학을 공부하기 위해 가족들과 함께 미국 유학길에 오른 것인데요.

 

 

미국 유학길에 오른 지 4~5년이 지난 후 한대수 씨가 7살 무렵이던 시기 돌연 실종됐습니다. 한대수 씨의  할아버지는 아버지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알아보았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참고로 한대수 씨의 할아버지 한영교 씨는 1930년대 학위 취득을 위해 미국에 건너간 초기 유학생으로, 호레이스 언더우드의 주도하에 백낙준 박사와 함께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를 설립한 인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한대수 아버지 한창석 FBI가 찾다

 

한대수 씨의 할아버지는 아들을 찾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긴 시간이 흐른 후 미국 FBI가 한대수 씨의 아버지를 찾아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한국말은 물론 과거의 기억을 모두 잊어버리고 다른 사람과 결혼까지 했으며 인쇄 출판업을 하는 등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한대수 씨 아버지 한창석 씨의 실종과 관련해서는 많은 소문들이 난무했는데, 특히 한창석 씨가 ‘수소폭탄의 아버지’로 불린 에드워드 텔러 박사의 수제자였고, 수소폭탄 제조기술을 본국으로 가져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 CIA가 관련되었다는 얘기가 있었습니다. 

 

 

참 영화와 같은 이야기가 아닐 수 없는데요, 한대수 씨에 의하면 아직도 아버지의 실종 이유와 그 이후 행적은 풀리지 않고 미스터리로 남아있다고 합니다.

 

 

그 사이 피아니스트였던 한대수 씨의 어머니 박정자 씨는 가족들의 권유로 재가를 하셨으며, 아버지를 찾은 후 한대수 씨는 미국으로 가 아버지와 약 3여 년 동안 함께 살았지만 새어머니의 냉대를 받았다고 합니다.

 

 

 

 한대수 미국 한국 생활

한대수 씨는 아버지가 실종된 이후 할아버지와 함께 살다가 아버지를 찾은 후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아버지와 3여 년을 함께 살았습니다. 

 

 

그가 미국으로 건너간 시기는 부산 경남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1965년으로 미국 뉴햄프셔 대학에서 수의학을 배우다가, 1967년 New York Institute of Photography에서 사진을 전공했습니다. 

 

이러한 성장배경 덕에 한대수 씨는 한국어보다 영어를 조금 더 잘하며 한국에서 영어 라디오 방송을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1968년 한국으로 귀국한 한대수 씨는 '세시봉'에서 포크 싱어송라이터로 데뷔하였고, 1974년 해군 제대 후에는 코리아 헤럴드 신문기자 겸 사진작가로 활동했습니다. 이 시기 1집 <멀고 먼 길>을 발표하였고, 그 해 제1회 한국가요제에서 10대 작곡가상을 수상했습니다. 



 

 한대수 부인 딸

한대수 씨는 한국에서 가수로 데뷔한 후, 2집 시절 만난 무용가 김명신과 결혼했으나 1990년대 들어 관계를 정리했습니다. 그후 1992년 모델 경력이 있는 몽골계 러시아인인 옥사나 알페로바를 만나서 재혼했습니다. 두 사람의 나이 차는 22세 입니다. 

 

 

결혼 15년 만인 2006년에는 딸 한양호(영어이름은 미셸)를 낳았으며 이때 한대수 씨 나이는 59세였습니다. 부모의 나이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문제없이 태어났다고 해서 딸 이름을 '양호'라고 지었다고 합니다. 

 

 

2016년 8월 딸의 교육을 위해 미국으로 이주했다가 2020년 음악작업을 위해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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